마태복음 14장 1절-12절
제목: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싸인, 신호가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각자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향하는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보내시는 싸인이고 기회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육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14장 1절- 12절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먼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14장 1절-2절을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그 능력이 예수님 속에서 역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의인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개념이 악한 헤롯의 마음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방탕한 삶을 살았고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의 특징을 본문의 헤롯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합니다.
본문 1절에 그 때는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소문나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
였던 때입니다. 소문이 헤롯에게도 들렸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 소문은 고향과 생각지도 못하는 권력자
에게도 들리게 됩니다. 좋고 나쁘고 나에게 잘하든 못하든지 예수의 소문은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로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세례 요한이 살아났고 그의 권능이 예수님께 역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헤롯은 세
례 요한과 예수님의 능력을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온 천하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세례 요한의 능력을
보았지만 그런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죄
책감에 시달리기때문입 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죄책감과 회개는 다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합리화를 위해
더 죄를 짓거나 두려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가룟 유다이며 자살을 했습니다. 사람이 죄책감을 갖게 되면
자유와 기쁨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고 통치자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리에 오
릅니다. 그들은 죄책감에 힘들어 하다가 제 명에 죽지 못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현장을 다시 찾는 이유도 불안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으면 뭔가 뒤에서 자신의 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도 방황하는 폐역하고 음란한 사람은 바로 이 시대의 헤롯입니다. 분봉왕
으로 로마의 권력으로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4분의 1을 통치하면서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했습
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려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누리는 사람은 죄 가운데 있기 쉽고 또
죄를 짓게 되면 온 세상이 두렵고 적이 됩니다.
또한 죄책감이 가득한 사람은 음욕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4장 3절- 4절을 보겠습니다. “전에 헤롯
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
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빌립의 부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행동입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왕의 잘못을 책
망할 수 있습니까? 헤롯은 왕이니 맘대로 사람을 죽이는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헤롯을 책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세례 요한이 헤롯을 책망했습니다. 헤롯
을 책망한 세례 요한은 능력이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헤롯은 이두매 사람 즉 에서의 후손입니
다. 에서의 후손인 헤롯이 영적인 후손이었던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악하고 음란하게 통치하였습니다. 로
마인에게는 유대인으로 행세하며 분봉왕 자리를 사고, 유대인에게는 믿음의 사람임을 자처하면서 로마 황제
처럼 살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시하며 다스렸습니다.
헤롯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옥에 가두었듯 나에게 충고하는 말이 듣기 싫어 그를 잡고 옥에 가둔 일은 없
습니까? 나의음욕을 꾸짖을 때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도 바른말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힘과 권세가
있어서 요한을 가두었지만 우리는 힘과 권세가 없어 못 가둘 뿐입니다. 딱 한 계단만 높은데 있어도 아랫사람
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면 타협할 수밖에 없고 물러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14장 7절에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또한 죽음을 두려워 한 헤롯의 다음 수순은 헛 맹세였습니다.
참 사랑이 아닌 순간의 감정과 동기로 헛맹세를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동기가
되어 백성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주는 부모는 자녀를 악으로 이끄는 어리석은 사람임을 헤롯을 통해 볼 수 있
기를 바랍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나라의 것을 자기 것처럼 주겠다고 합니까? 그
런데 의외로 그런 부모와 배우자와 하루라도 살아 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파티를 열어주고 씀씀이도 크고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들어주니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때 헛된 맹세를 합니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잘못 행동한 일은 없습니까?
마태복음 14장 6절을 보겠습니다.“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
을 기쁘게 하니.” 내 뜻을 관철시키는 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려는 날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마
십시오. 그 날이 헤롯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고 요한에게는 순교의 날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를 그린 명화가 있습니다. 살로메는 야하게 생긴 것보
다는 순진무구하고 신비하게 생겼습니다.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게 생겼습니다. 그런 살로메가 춤을 추는데
아버지 헤롯이 안 넘어 가겠습니까? 헤롯은 아내와 자식 일은 두 팔을 걷고 나선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4장 8절-9절을 보면 “8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
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살로메가 어머니의 말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십대 소녀가 이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엄마 헤로디아도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왕이 둘이나 그것도 형제끼리 다투며 아
내를 삼고자 했습니다. 한번 되기도 힘든 왕비를 두 번이나 했습니다. 딸도 요정처럼 예쁘고 부모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선한 여자는 악한 남자를 선한 만큼 끌어 올리지만 악한 여자는 선한 남자를 악한 만큼 끌어 내
립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미모로 멸망할 선택을 했습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살로메도 좋은 환경에서 교육 받고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순종하는 딸이었지만 세례 요한의 목
을 구한 일이 그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부모인 내가 구하는 것을 내 자녀도 구하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하지만 모든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효도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
됩니다. 살로메는 엄마 말 잘 듣다가 영원히 멸망할 말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예수 믿게 하는 일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책감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
엇입니까? 가난이 두려워 돈과 타협하고 주일성수 대신 돈을 벌고 있지는 않습니까? 재미있게 사는 것이 좋
아 쾌락에 무너지고 있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헛맹세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가 없는 배우자나 자
녀를 감싸고 돌아 구원의 기회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두려움도 갖지 않고 말씀대로 사시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은 무리의 지지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5절에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하지만 무리들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지지했습니다. 이처럼 무리가 지지하는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을 돈 많고 똑똑한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요한
이 헤롯의 죄를 지적했던 일을 기억하고 선지자로 여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당신이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헤로디아 때문에 망하기를 원하느냐”라고 담대하게 꾸짖었습니다. 둘이 아무리 행복하
게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없으면 권세와 재력을 가지고 이처럼 악하게 산다는 것을 알았던 세례요
한이 담대하게 책망을 했습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해야 무리가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요한처럼 꾸짖기 위해서는 삶이 따라야 하고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헤롯 같은 사람이 나를 지지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가진 것이
많고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이 천국에 관심이 있을까요? 헤롯이 죄를 지적 받고 세례 요한을 죽였던 것처럼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 복음을 거부합니다.
여러분! 천국 복음을 듣고 지지했던 사람은 헤롯이 아니라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헤롯처럼 환경이 좋
으면 나쁜 사람, 환경이 힘들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떻든 자기 삶에서 구원 때문에 애
통한 사람에게는 천국이 임합니다.
하지만 그 애통한 사람 중에 기득권층보다 일반 대중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돈과 권세를 가진 헤
롯이 아니라 무리가 지지하는 삶을 살다가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을 끝
까지 지지해 주는 사람은 몇명이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행함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많
은 죽음을 준비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비참한 죽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0절- 12절을 읽겠습니다.“9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0 그 머리를 소반에 얹
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1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하나님도 무리도 선지자로 알고 위대하게 여겼던 세례 요한을목 베어 소반에 얹게 한 사람은 정분에 불탔던
한 여인의 어린 딸이었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재물도 없고,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개죽음을 맞는다
면 누가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죽을 때도 너무 아름답게 죽고 싶어 합니다. 모나코의 왕비였던 그레이스 케리는 죽을 때 화장을 하
고 전 세계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죽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을 얼마나 옥에서 꺼내 주고 싶으셨을까요? 요한이 아니라 헤롯이 죽어야 마땅할 일이지
만 천국은 세상과 다릅니다.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써 천국,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죽는 모습까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의 죽음이 비참했지만 그 죽음이 예수님께 고해졌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 고해지는 죽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죽음이라면 모든 이들에게 천국
을 증거하고 갈 수 있습니다.남들보다 일찍 가도, 질병으로 고통당하다가 가도 그 죽음은 비참한 죽음이 아
니라 아름답고 숭고한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을 이 땅에서 구해 주지 않고 천국에서 영접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한 번
설교로 3천명, 5천명을 전도했지만 스데반은 한 번 설교하는 중 돌에 맞아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스데
반이 피를 흘리고 죽음으로 하나님을 전하여 그 현장에 있던 사도 바울이 전도되어 이방 선교의 문이 열렸습
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죽음이 바로 세계 복음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의 책 거울 너머의 세계에 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배운 사실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음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식으로 죽느냐하는 사실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분노와 쓴 뿌리 속에서 죽어 간다
면 나는 내 뒤에 남게 될 가족과 친구들을 혼란과 죄책감과 부끄러움과 연약함 속에 처하게 할 것이다. 만일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할 수 있고, 용서하고 싶고 용서 받고 싶은 열망을
가질 수 있다면, 또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기쁨과 평안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가득할 수 있다면,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이 어떻게든 나의 삶과 관련이 있었던 모든 사람도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동안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낼 수 있었던 것보
다 훨씬 더 많은 참된 영적 자유를 나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죄책감으로 묶어 놓을 수도 있고 자유롭게 감사할 수 있는 상태에 놓아 둘 수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바로 하나는 생명을 주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죽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 마포나루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가면 이름도 없는 묘비가 많습니다. 6.25전쟁으로 비석이 훼손되고 손
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물넷에 한국으로 와 처녀로 죽은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무덤에는“만일 나에게 천개
의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한국에 주겠노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헐버트 선교사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 민스터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
하로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순교한 선교사들의 값진 죽음으로 한국 이 부유해졌습니다.
빛도 없이 죽어 간 그들의 사랑 때문이 우리는 영적으로 육적으로도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도 각자의 분량이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 옵니다. 여러분은 어
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이 나를 부르시더라도 내 죽음은 나의 삶으로 기억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오라고 하시면 언제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
서 대답하면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 안 죽겠다고 발악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본문에 세례요한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예수님께 아뢰어졌기에 그의 죽음은 아름다고 숭고한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죽음의 순간까지 주께 맡겨야 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 옵니
다. 하지만 세례 요한처럼 믿음 있는 자의 죽음은 예수께 아뢰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
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과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복음을 전해 주셔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시대가 악하고 어려움도 많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잘 준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