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7일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고 흘려 보내자.” 여호수아 17장 14절-18절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오늘도 주님이 예배에 함께 하십니다.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주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오늘은 여호수아 17장 14절-18절을 통해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고 흘려 보내자”라는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여호수아 16장에는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요셉족속에 대한 이야기를 많은 분량 성경에 할애 되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다양하고, 풍성하며,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 의 분배는 제비뽑기로 했습니다. 여호수아 17장 14절에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이 구절은 여호수아에게 요셉족속이 자신들의 땅에 대한 불평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 17장에 요셉족속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좋지 않게 끝납니다.
이에 지도자 여호수아가 여호수아 17장 15절에 “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고 대답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복을 많이 받은 민족인데 왜 이것밖에 주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왜 맨날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십니까? 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여호수아가 “그래 맞다. 네가 말한 대로 너는 복을 많이 받은 존재다. 그러니 가서 개척을 하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들을 때 “선교하러 가라는 이야기인가? 교회를 개척하라는 말인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셉족속에게 개척하라는 말은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요셉은 어떤 복을 받았는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는지 성경에서 확인해 볼까요?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야곱은 나이가 많고 하나님께 갈 날도 가까웠습니다. 야곱이 첫째 아들 르우벤부터 모든 아들들에게 복을 빕니다. 요셉에게 빌었던 복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22절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샘 곁에 있으니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또한 얼마나 무성했던지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만 머물지 않고 국제적으로 그 복이 흘러가는 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복이 넓고 평탄한 상태에서 받게 되는 복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9장 23절에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일생에 대하여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셉의 일생이 어땠습니까? 23절 말씀처럼 항상 사람들이 그를 학대하고, 미워 하고,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요셉이 당했던 고난의 순간들을 시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되나요? 창세기 49장 24절에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이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떤 조건이 있지 않았다는 합니다. 야곱의 전능자, 즉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힘입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복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끝나 지 않습니다.“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난다.” 이 예언때문에 요셉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요셉에게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오게 됩니다. 놀랍게도 요셉의 일생을 성경에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하시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의 일생을 통해 신약에 오실 메시아의 그림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 25절 - 26절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이 말씀을 야곱이 요셉에게 빈 복입니다. 이 복을 여러분도 받고 싶으십니까? 요셉에게 빌었던 복이 갈수록 흐려지지 않고 더 강화되고 심화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약속하는 구절이 신명기 33장 13절-16절입니다.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3절에 그 땅이 여호와께 받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복을 주지 못해 애를 태우시는 분 같아요. 이어지는 말씀도 전부 복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보물 즉 단어를 건널 때마다 복이 나와요. 창세기의 복보다 더 심화되고 강화되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라는 표현도 이상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형제 중 뛰어난 자로 표현됩니다. 야곱이 복을 빌면셔 요셉에 대해 따로 설명을 합니다. 요셉이름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십시오. 여러분은 요셉보다 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안에 성령을 통해 와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거처 삼아 항상 함께 계십니다. 복받은 사람임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그 형제 중 구별한 자 요셉에 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셉은 여러 형제들이 있었고 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미음을 받는 데서 나아가 죽임을 당하려다 애굽으로 노예로 팔렸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팔린 자라는 상징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고 그 형제들을 모두 건저내고 살리게 됩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도 이 사실을 나
중에 깨달았습니다. 형들의 미움으로 팔린 요셉이 그 형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런 요셉을 상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 없으신 분이 고난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표현합니다. 건축을 해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지만 백성들이 땅의 주인을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버려진 돌이 머리돌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을 짓는 방법은 한국 사람들의 방법과 정반대라고 합니다. 그들은 머릿돌부터 놓고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머릿돌에서 집이 완성됩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의 처음과 끝이 됩니다. 그 분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 인물이 구약에서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역사를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 원칙은 절대 주류를 들어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차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남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래 장남은 에서였는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히브리어의 경홀히 여겼다는 말은 자기 영혼을 망하는 자의 자리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장자의 명문을 취한 야곱도 평생 장자노릇을 못하다가 늘그막에 깨달게 됩니다. “내게 은혜 받을 명분이나 조건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서 살아왔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은 가장 사랑한 아내 라헬에게서 낳았던 요셉입니다. 그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팔려 종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첫째 아들은 므낫세이고 둘째 아들은 에브라임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잘 안 보이는 야곱을 위해 요셉이 장자를 그의 오른 손 앞에 차남인 에브라임을 왼손 앞에 둡니다. 그런데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얹고 복을 빌었습니다. 장자와 차자가 바뀐 것입니다. 실제 장자의 권한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가 됩니다. 성경에서 에브라임이라고 말할 때는 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족보가 여기서 달라집니다. 열두 지파를 정할 때 요셉이 빠집니다. 대신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두 지파로 들어갑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기업인 레위 지파도 빠지면서 열두 지파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족보상 요셉은 졸지에 아버지 야곱과 동격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요셉을 족장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 형제 중 구별된 자, 그리고 뛰어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높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요셉에게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요셉을 산고 끝에 꿈을 이루고 성취해낸 사람, 또는 성공지향적인 모델로 설명하고 이해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요셉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렸지만 부요케 되어 민족과 만민을 먹여 살린 사람, 요셉이 맡았던 배역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런 사람으로 나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그 일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다음은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삶입니다.
여호수아 17장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런 배역을 맡았던 요셉 족속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비뽑아 자기 몫을 받고도 땅을 더 요구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복을 받아야 될 것 아닌가?”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런 생각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계속 헝클어지고 고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이 둘 가질 때 나는 넷을 가져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요셉에게 주겠다고 하신 원천의 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알려면 요셉에게 약속된 원천의 복의 진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이 형통케 된다는 말이 두 곳에서 나옵니다. 한 곳은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 보내시고 나서 하신 말씀에 나옵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곳은 하나님이 요셉을 감옥에 넣은 후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여러분! 우리의 상식으로 요셉이 처한 상황들은 결코 형통한 상황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해하는 형통과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하시려는 형통이 다름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원천의 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나는 너희들을 내 소유로 삼았을 뿐만아니라 너희들이 있는 우주 만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와 언제나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형통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낮은 감옥에 임하셔서 그 고통의 세월 속에 요셉과 함께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눈물과 고통스럽던
세월 속에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천의 복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늘 영광 보좌에 계시던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잠 잘곳도 없을 정도로 스스로 가난하게 되어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는 의미도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시고,몸도 건강하게 해 주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는 말은 그 분이 내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살기 시작하셨다. 내 속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내주 하기 시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가 원천적인 복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뒤죽 박죽 형편없는 고난의 세월 속에 있다고 해도 거기에 이미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가장 복된 일이고 큰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내 생각과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아무리 출세를 하고, 돈이 많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누려도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형통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더 구체적으로 따져 봅시다. 원천의 복을 받았다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의 복인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죠? 우리가 원천의 복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영원히 죽을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전세, 월세로 살다가 새집을 산 것 같은 현세적인 가치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죽을 자리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리로 옮김 받은 복입니다. 세상 가치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거기서 끝내지 않으시고 아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내 속에 내주하여 충만하게 거주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원천의 복 앞에서는 내가 가진 것이 있다가 없어지거나 열 개 가졌다가 두 개 가지게 되는 것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런 것과는 비교를 할 수 있는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경계선을 잘 모릅니다.
여호수아 17장의 요셉족속도 그것을 모르니까 여호수아에게 땅을 더 달라고 엉뚱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결론은 개척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저 경계선 밖, 절벽 같은 삶의 자라에 않아 이 원천의 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을 흘려 보내 주라는 말씀입니다.
개척하라는 히브리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면 cut down즉 나무를 잘라서 길을 내다라는 뜻입니다. 아직 길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대로 보여 주고,그들을 섬기고,베푸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의 현장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 족속의 요구처럼 땅을 더 달라고 이 땅의 복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요셉족속에게 주셨던 원천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전부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부를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이 보배로운 가치를 세속적인 가치와 비교하면서 세상 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기준과 기초가 틀렸습니다. 다른 데서 자꾸 헤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때로는 나에게 돈도 맡기시고 건강도 맡기십니다. 왜 맡기시는지 아십니까? 요셉의 일생을 통해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 분이 사신 삶을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하십니다. 요셉족속처럼 원천의 복을 받은 자로써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일상을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이웃에게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나누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의 제사가 있습니다. 그 제사는 길 잃은 영혼들을 향해 개척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원천의 복을 흘려 보내고 나누어 주고 베푸는 삶이 바로 개척하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많은 것을 가지면 베풀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결국 잘난 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재물을 주시고 높은 자리도 주신 목적은 7년 흉년으로 죽어가는 만민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사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요셉을 통해 보여 주셨던 그림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가난하게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런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도 가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다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눈에 보이는 기준과 가치로 비교하며 생각하니까 덜 가졌다. 안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전부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자리, 어떤 형편에 처해도 반드시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옷을 입고 내 곁에 온 것처럼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도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난과 시련, 고난도 부요입니다. 그것들조차도 나누는 일에 사용하라고 경험하게 만들고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가치 기준에서는 가난과 부의 경계선이 무너져야 합니다.
“개척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어 주고, 흘려 보냄으로 형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세상 다른 어떤 복과 비교할 수 없는 원천의 복,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에게 주신 복을 움켜쥐는 손을 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남은 생애 나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삶을 결단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형통한 삶을 누리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