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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에발 산의 복음을 삶에서 누립시다.” 여호수아 830-35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오늘도 주님이 예배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보내 셨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매일,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모든 일과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도 모두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에발 산에서 주신 복음의 내용을 통해 함께 듣겠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운동 중 축구가 있습니다. 90분 동안 22명이 축구 장안에서 뜁니다. 90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뛰면 어떻게 될까요? 축구는 가장 격렬하고 거친 운동 중 하나입니다. 쉬지 않고 90분을 뛰면 심장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중간에 하프 타임으로 15분 쉬게 합니다. 전반 45분을 뛰고, 15분 쉬면서 후반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830-35까지의 말씀이 바로 여호수아 전체의 하프타임이라고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성 여리고성의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자만한 이스라엘 공신체는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원인을 찾았더니 아간의 범죄였습니다. 그 때의 흔적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그 흔적은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로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셨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합니다.

먼저, 세겜이라는 장소를 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까지 두 차례 격렬한 싸움을 치른 후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의도로 이스라엘 백성을 에발 산 앞에 세우셨을까요? 여호수아 830절에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 산에 이 제단을 쌓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지역은 세겜 땅이고 에발 산에 있습니다. 이 장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겜은 기억해야 할 장소이고 확약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때까지 족장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은 아브라함입니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족장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삭이 있지만 이삭은 족장이어도 대표적인 족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삭보다는 야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메시지가 많습니다. 우리는 두 인물을 우선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이면서 세겜은 그들과 아주 중요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 이방 땅이었고 아브라함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그의 인생 속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짐을 싸서 아버지를 모시고 떠납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머뭇거립니다. 하란은 강을 건너기 직전의 장소입 니다. 그들이 머뭇 거릴만한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강을 건너면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머무는데 동안에 함께 왔던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여기까지의 여정은 아버지 데라가 주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데라라는 이름의 뜻이 관련이 있습니다. 데라는 지연 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지연키시는 육신의 아버지 데라를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아브라함의 행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121절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짐을 싸 전부 짊어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 밟았던 가나안 땅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세겜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아브라함의 입성을 창세기 125절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을 쌓았던 장소도 바로 세겜 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겜이라는 지역의 첫 의미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장소입니다.

아브라함 다음으로 대표적인 족장은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그의 이름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 발꿈치를 붙잡은 , 사기꾼, 도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형의 분노로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이 됩니다. 야곱을 그대로 두면 두 아들을 다 잃게 될 것 같아 어머니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그 곳에서 머물라고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나 외삼촌 집으로 향합니다. 길을 가다가 루스라는 산 중턱에서 밤을 맞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떠있고, 이슬이 내리고 추워지는 날씨에 벌벌 떨면서 돌을 베개 삼아 잡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그런데 사닥다리가 하늘을 향해 서 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환성을 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2813-15입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반드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길을 떠나라 고 하십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사기 치는 일이라면 야곱이 따라갈 수 없는 라반을 붙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쁜 버릇을 고치려고 더 쎈 사람을 내 옆에 붙여 놓으시기도 하십니다. 야곱은 장장 20년을 라반에게 속아 살았습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돌아옵니다. 그것도 아내를 넷, 열두 아들을0 거느리고 재산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외삼촌에게서 떠나 다시 돌아와서 도착하고 제단을 쌓았던 장소가 어디인지 아세요? 그 장소도 바로 세겜입니다. 세겜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세겜은 적어도 이스라엘 족장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었고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런 이유로 돌아오는 족장들은 제단을 쌓은 장소였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8장에서도 두 전쟁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세겜 땅에 다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어떤 환경과 어려움 속에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견디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에발 산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는 곳은 세겜 땅의 에발 산입니다. 이 에발 산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신명기 112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는 땅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830절을 보십시오.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 구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겜 땅을 통해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을 지금 축복의 그리심 산에 세우지 않고 에발 산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 에발 산은 축복을 선포하는 곳이 아니고 저주를 선포하는 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에 세우시고 죽이시겠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복음의 메시지가 있습.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백서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들이 순종을 잘해서나 열심히 노력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까지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지은 죄로 마땅히 죽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조상과 약속하신 그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 때문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구원에 대한 중요한 그림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열심히 살거나 나에게 어떤 작은 근거가 있어서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첫 근거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사랑하심으로 가능합니다.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들이 수고하거나 노력을 하거나 순종하여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류와 사람들의 지난 역사를 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세월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하고 죽을 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를 향한 고발의 내용이기고 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에발 산에 쌓은 제단입니다.

여호수아 831절을 보십시오.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이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는 그냥 소제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반드시 어린양의 죽음으로 드리는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이 단에서 번제로 드리게 했습니 다. 그리고 쌓은 단을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새 돌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이 생명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구원의 근거는 바로 그 단에 바쳐지는 어린 양의 공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 다 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무너뜨리는 이단 중에 몇월 몇시에 구원받았느냐를 묻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구원 받은 날찌를 알면 구원받고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구원이요?”라고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구원은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문제로 고통스러운 사람은 그 문제에서 해방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수 만 가지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입니다. 요한삼서 1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전인구원 또는 총체적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속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가능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이고 왜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교회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현장으로써의 예배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일구로 현장예배가 어려워지면서 자칫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힘들어도 현장예배에 나와 말씀을 듣고 주님께 고백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몸에 연합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이 비틀려지고 왜곡되어 자꾸 사람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사람의 공로를 높이는 일들도 많아집니다. 또한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향기가 아니라 사람의 냄새가 납니다. 인간의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2천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려주신 보배로운 피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의 근원이요. 시작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일어서는 현장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발 산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저주 아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철저히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동시에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붙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도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721-23절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절망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하는 이중적인 절망입니다. 로마서 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끝났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절망과 죽음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소식, 놀라운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로마서 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에발 산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룩진 영혼과 눈물과 절망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또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를 멀리 던지시고 우리에게 죄 없다 하신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찬송가 중에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능력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쉬지 않고 우리 속에서 더러운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로 죄를 속하는 삶을 살고 자유를 누리시기바랍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감사하는 삶, 감탄하는 삶을 사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834절을 보겠습니다.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백성들이 듣고 선택하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모든 백성들을 모아 놓고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여호수아 2415절입니다.“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 구절은 선택하라는 것일까요? 복도 있고 저주도 있으니 알아서 선택하라는 의미입니까?

자녀를 키우다 보면 이런 심정이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데 조금 크면 부모의 말을 잘 안 들어요.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달래고 어르고 설득을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되면 흔히 밥 먹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공부하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이것은 아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극단적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너는 선택할 여지가 없으니 까불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와 비슷합니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선택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압니다. 여호수아 833절을 보겠습니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악한 백성들을 하도 많이 겪으셔서 축복과 저주를 같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와 여호수아에서 계속 저주와 복을 함께 기록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제 저주가 하나님의 본 마음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축복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일까요? 우리들이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말을 듣지 않고 뺀질 거리면 하나님을 손을 보십니까? 기독교는 이런 흑백 논리로 이해하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율법 종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축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핸드폰을 사달라고 부모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쉽게 표현하면 들들 볶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할 수 없이 너 이번에 말 잘 들으면 핸드폰을 사줄게. 여러분! 부모가 핸드폰을 사 주는 일이 긍극적인 목적입니까? 철이 들지 않은 자식이 그것을 받게 되면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 말을 잘 들었더니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이 커지고 인격이 성숙하고 궁극적으로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앞으로 자녀와 함께 하려고 그려 놓은 그림에 동참하는 수준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핸드폰은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초등학교 수준의 축복일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않을 때는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렇게 알고 믿다가 죽는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되겠습니까?

또한 저주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축복도 하나님의 궁극적 인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핸드폰 같은 축복에 너무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상속받고, 그 나라를 사는 사람이 겨우 세상에서 쓰게 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 여러분의 관심과 초점을 좀 더 높이시기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읽어 내는 능력을 더 키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을 높은 데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66권 전체의 메시지이고 에발 산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린 양의 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훈련시켜 가시기를 원하시는지 깨닫는 철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기도 하나님의 자녀 부르시고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살게 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알고 합당한 삶을 결단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성숙한 믿음으로 아버지의 마을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그림에 부합하는 삶을 남은 생애동안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오늘도 주님이 예배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보내 셨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매일,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모든 일과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도 모두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에발 산에서 주신 복음의 내용을 통해 함께 듣겠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운동 중 축구가 있습니다. 90분 동안 22명이 축구 장안에서 뜁니다. 90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뛰면 어떻게 될까요? 축구는 가장 격렬하고 거친 운동 중 하나입니다. 쉬지 않고 90분을 뛰면 심장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중간에 하프 타임으로 15분 쉬게 합니다. 전반 45분을 뛰고, 15분 쉬면서 후반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830-35까지의 말씀이 바로 여호수아 전체의 하프타임이라고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성 여리고성의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자만한 이스라엘 공신체는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원인을 찾았더니 아간의 범죄였습니다. 그 때의 흔적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그 흔적은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로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셨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합니다.

먼저, 세겜이라는 장소를 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까지 두 차례 격렬한 싸움을 치른 후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의도로 이스라엘 백성을 에발 산 앞에 세우셨을까요? 여호수아 830절에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 산에 이 제단을 쌓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지역은 세겜 땅이고 에발 산에 있습니다. 이 장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겜은 기억해야 할 장소이고 확약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때까지 족장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은 아브라함입니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족장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삭이 있지만 이삭은 족장이어도 대표적인 족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삭보다는 야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메시지가 많습니다. 우리는 두 인물을 우선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이면서 세겜은 그들과 아주 중요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 이방 땅이었고 아브라함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그의 인생 속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짐을 싸서 아버지를 모시고 떠납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머뭇거립니다. 하란은 강을 건너기 직전의 장소입 니다. 그들이 머뭇 거릴만한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강을 건너면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머무는데 동안에 함께 왔던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여기까지의 여정은 아버지 데라가 주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데라라는 이름의 뜻이 관련이 있습니다. 데라는 지연 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지연키시는 육신의 아버지 데라를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아브라함의 행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121절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짐을 싸 전부 짊어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 밟았던 가나안 땅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세겜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아브라함의 입성을 창세기 125절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을 쌓았던 장소도 바로 세겜 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겜이라는 지역의 첫 의미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장소입니다.

아브라함 다음으로 대표적인 족장은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그의 이름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 발꿈치를 붙잡은 , 사기꾼, 도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형의 분노로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이 됩니다. 야곱을 그대로 두면 두 아들을 다 잃게 될 것 같아 어머니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그 곳에서 머물라고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나 외삼촌 집으로 향합니다. 길을 가다가 루스라는 산 중턱에서 밤을 맞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떠있고, 이슬이 내리고 추워지는 날씨에 벌벌 떨면서 돌을 베개 삼아 잡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그런데 사닥다리가 하늘을 향해 서 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환성을 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2813-15입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반드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길을 떠나라 고 하십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사기 치는 일이라면 야곱이 따라갈 수 없는 라반을 붙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쁜 버릇을 고치려고 더 쎈 사람을 내 옆에 붙여 놓으시기도 하십니다. 야곱은 장장 20년을 라반에게 속아 살았습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돌아옵니다. 그것도 아내를 넷, 열두 아들을0 거느리고 재산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외삼촌에게서 떠나 다시 돌아와서 도착하고 제단을 쌓았던 장소가 어디인지 아세요? 그 장소도 바로 세겜입니다. 세겜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세겜은 적어도 이스라엘 족장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었고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런 이유로 돌아오는 족장들은 제단을 쌓은 장소였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8장에서도 두 전쟁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세겜 땅에 다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어떤 환경과 어려움 속에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견디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에발 산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는 곳은 세겜 땅의 에발 산입니다. 이 에발 산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신명기 112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는 땅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830절을 보십시오.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 구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겜 땅을 통해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을 지금 축복의 그리심 산에 세우지 않고 에발 산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 에발 산은 축복을 선포하는 곳이 아니고 저주를 선포하는 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에 세우시고 죽이시겠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복음의 메시지가 있습.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백서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들이 순종을 잘해서나 열심히 노력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까지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지은 죄로 마땅히 죽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조상과 약속하신 그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 때문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구원에 대한 중요한 그림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열심히 살거나 나에게 어떤 작은 근거가 있어서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첫 근거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사랑하심으로 가능합니다.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들이 수고하거나 노력을 하거나 순종하여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류와 사람들의 지난 역사를 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세월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하고 죽을 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를 향한 고발의 내용이기고 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에발 산에 쌓은 제단입니다.

여호수아 831절을 보십시오.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이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는 그냥 소제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반드시 어린양의 죽음으로 드리는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이 단에서 번제로 드리게 했습니 다. 그리고 쌓은 단을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새 돌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이 생명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구원의 근거는 바로 그 단에 바쳐지는 어린 양의 공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 다 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무너뜨리는 이단 중에 몇월 몇시에 구원받았느냐를 묻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구원 받은 날찌를 알면 구원받고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구원이요?”라고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구원은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문제로 고통스러운 사람은 그 문제에서 해방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수 만 가지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입니다. 요한삼서 1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전인구원 또는 총체적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속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가능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이고 왜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교회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현장으로써의 예배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일구로 현장예배가 어려워지면서 자칫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힘들어도 현장예배에 나와 말씀을 듣고 주님께 고백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몸에 연합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이 비틀려지고 왜곡되어 자꾸 사람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사람의 공로를 높이는 일들도 많아집니다. 또한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향기가 아니라 사람의 냄새가 납니다. 인간의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2천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려주신 보배로운 피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의 근원이요. 시작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일어서는 현장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발 산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저주 아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철저히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동시에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붙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도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721-23절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절망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하는 이중적인 절망입니다. 로마서 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끝났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절망과 죽음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소식, 놀라운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로마서 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에발 산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룩진 영혼과 눈물과 절망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또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를 멀리 던지시고 우리에게 죄 없다 하신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찬송가 중에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능력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쉬지 않고 우리 속에서 더러운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로 죄를 속하는 삶을 살고 자유를 누리시기바랍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감사하는 삶, 감탄하는 삶을 사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834절을 보겠습니다.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백성들이 듣고 선택하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모든 백성들을 모아 놓고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여호수아 2415절입니다.“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 구절은 선택하라는 것일까요? 복도 있고 저주도 있으니 알아서 선택하라는 의미입니까?

자녀를 키우다 보면 이런 심정이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데 조금 크면 부모의 말을 잘 안 들어요.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달래고 어르고 설득을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되면 흔히 밥 먹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공부하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이것은 아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극단적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너는 선택할 여지가 없으니 까불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와 비슷합니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선택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압니다. 여호수아 833절을 보겠습니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악한 백성들을 하도 많이 겪으셔서 축복과 저주를 같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와 여호수아에서 계속 저주와 복을 함께 기록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제 저주가 하나님의 본 마음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축복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일까요? 우리들이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말을 듣지 않고 뺀질 거리면 하나님을 손을 보십니까? 기독교는 이런 흑백 논리로 이해하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율법 종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축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핸드폰을 사달라고 부모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쉽게 표현하면 들들 볶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할 수 없이 너 이번에 말 잘 들으면 핸드폰을 사줄게. 여러분! 부모가 핸드폰을 사 주는 일이 긍극적인 목적입니까? 철이 들지 않은 자식이 그것을 받게 되면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 말을 잘 들었더니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이 커지고 인격이 성숙하고 궁극적으로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앞으로 자녀와 함께 하려고 그려 놓은 그림에 동참하는 수준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핸드폰은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초등학교 수준의 축복일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않을 때는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렇게 알고 믿다가 죽는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되겠습니까?

또한 저주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축복도 하나님의 궁극적 인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핸드폰 같은 축복에 너무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상속받고, 그 나라를 사는 사람이 겨우 세상에서 쓰게 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 여러분의 관심과 초점을 좀 더 높이시기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읽어 내는 능력을 더 키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을 높은 데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66권 전체의 메시지이고 에발 산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린 양의 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훈련시켜 가시기를 원하시는지 깨닫는 철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기도 하나님의 자녀 부르시고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살게 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알고 합당한 삶을 결단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성숙한 믿음으로 아버지의 마을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그림에 부합하는 삶을 남은 생애동안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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