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 “약속의 아침을 소망하라.” 여호수아 8장 1절-9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3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5 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 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6 그 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7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 8 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 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
주님이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7월 셋째 주일예배에 동참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지난 10일-16일까지 함부르크에 서는 코로나 일구 새로운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17일에 한 명, 18일엔 5명이 나왔습니다. 한 주간 건강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특별 하신 은혜가 있고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도 약속의 아침을 소망하라는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이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이 주신 평안이 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실패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분은 아브러헴 링컨이라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에게 어느 날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과 존경 받는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때 링컨 대통령이 곧바로 대답을 했습니다. “실패입니다. 제가 수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한 번쯤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실패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패를 통해 무엇이든 한 가지를 배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고 부족함이 많습니다. 또한 죄성이 있어 언제든 실수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큰 실패나 작은 실패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알렌산더 휘튼이라는 사람은 실패에 대해 이런 정의를 했습니다. “가장 나쁜 실패는 다시 시작해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밟고 점프를 하느냐! 아니면 그냥 미끄러져 구렁텅이로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끝을 내느냐!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여호수아 8장전 앞의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리고성 전쟁에 서 이스라엘은 특별한 전략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여리고 전쟁의 승리에 빠져 가나안에서 사는 삶의 원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힘의 논리로 아이성 싸움을 시도했습니다. 그 성을 정탐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올라 갈 필요가 없다. 삼천 명만 뽑아서 보내자. 나머지 백성들은 그냥 가지 않아도 넉넉히 아이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아이성과 싸움을 시작했지만 밀려서 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도망쳐 왔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시편 37편 24절의 말씀같이 “그는 넘저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좌절의 끝으로 가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대 택한 자녀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모두 다 넘어 질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온갖 상처와 멍으로 얼룩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어떤 순간에도 그 사람의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사업실패로 희망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자녀와 말이 통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소망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다가오는 소망의 아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을 다시 발견하고 만나는 소망으로 여러분의 힘든 현실을 견뎌 내시기바랍니다.
다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실패를 어떻게 딛고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8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이 말씀은 기가 막힌 참패를 당하고 엎드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일어나 올라가라.” 여러분! 어디로 올라 가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곳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실패한 곳은 어디입니까? 여호수아 1장 후반 절에 “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앞으로 하나님께서 넘겨줄 것이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넘겨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정말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나의 가족이나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가진 힘과 능력만으로는 도와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 11절-17절에서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에게 하신 일입니다. 나인성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죽어서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과부는 동네 사람들과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동네 밖 무덤으로 가고 있습니다. 울면서 아들의 관을 따라가는 과부 곁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따라갑니다. “일어나 용기를 내야지, 괜찮아, 내가 함께 할께”라는 위로만 할 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워도 함께 울어 주고 장례를 도와주는 이상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장례행렬을 보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누가복음 7장 13절에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4절-15절에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주시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도 패배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치는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벌써 그 땅을 주셨다며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은 약속의 말이 신명기 1장 21절에 이미 주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이 약속은
언제 하신 말씀일까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방 땅 갈대아 우리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시고 가나안 땅의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그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상기 시켜 주심으로 갱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도 많은 고난의 시간들을 살아야 했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회복하셨던 근거 역시 “내가 이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는 언약을 갱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오늘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중요한 원칙이고 원리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실패하고, 구덩이 묻힌다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 세상 사람들의 격려나 위로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가 흐르고,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일관되게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도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혹시 넘어질 수는 있지만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호수아 8장 2절을 보겠습니다. “ 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여기서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명령과는 반대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는 모든 탈취물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아긴이 어겼습니다. 도둑질이나 사기를 치는 일도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이 다르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왜 도둑질을 하고,남을 속이는지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 힘으로 인생을 살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형상을 만들고 절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먹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복이라 말합니 다. 여러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먹고 살 것을 하나님이 충분하게 준비해 주심을 믿었다면 아간이 도둑질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
엘 백성들에게 아이 성에서 취한 것들은 그들이 모두 가지라고 명령하
십니다. 여리고성은 첫 전투이고 첫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후로는 모두 그들이 누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간이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아간이 만일 이 사실을 알고 믿었다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간에게 회개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제비뽑기를 하셨습니다. 지파를 뽑고,족속을 뽑고,가족을 뽑고 마지막은 아간이 뽑히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아간은 회개하지 않고 버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그가 자복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잘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즉시 심판하시는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아간은 돌이키지 않아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희생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간처럼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이키고 용서받을 회개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회개합시다. 좋으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신 하나님을 소망하십시오.
여호수아 8장 2절 후반절에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8장 전체에 매복 또는 복병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나요? 무려 열 번 넘게 나옵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고 히브리어는 아라브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아라브입니다. 매복은 군사용어인데 진지나 참호를 파고 땅에 엎드려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아라브라는 단어가 여호수아 7장 5절-6절에도 쓰였습니다.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땅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매복하는 모습입니다. 티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역시 아라브입니다. 해석하면 땅의 흙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는 어떤 작전을 썼나요? 대낮에 나팔을 불고,소리치고,시위하는 작적입니다. 대포 한방 쏘지 않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이 성에서는 야간에 매복하는 작전을 쓰셨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전투가 전혀 다른 싸움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원리는 항상 같습니다. 아더 왕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은 좋았던 습관이 하나 그 땅을 부패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에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점점 굳어지고 경직되어 나중에는 내용은 쑥 빠져 나가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껍데기만 붙잡고 그것이 알맹이인 것처럼 붙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화든,직분이든, 무엇이든 순환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든 오래 붙들고 있으면 거기에는 꼭 부패가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본질을 향하되 문화와 방법은 언제나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주 다양하게 일하십니다. 여리고성에서는 침묵하며 돌라고 했습니다. 아이성에서는 매복을 시키셨습니다. 이 전쟁은 주체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이성은 어땠나요? 매복을 여러 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각기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단창을 든 손으로 아이성을 가리키라고 명하신 그 시간에 백성들은 캄캄한 밤에 땅의 티끌처럼 구푸려 기다리는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두 전쟁을 통해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영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처음 설교 시작을 실패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는 사실 실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땅에 엎드리게 하시는 시간입니다. 티끌처럼, 흙덩이처럼 우리의 본문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엎드리라 하신 시간입니다. 어두운 밤과 같은 매복의 시간은 소망의 아침, 약속하신 시간을 기다리며 얼마나 잘 엎드리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집니다. 지금 여러분 인생에서 칠흙처럼 어두운 문제에 부딪혔다면 지금 여러분의 시간도 주님이 매복시키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잘 견뎌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법궤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구푸려 티끌을 뒤집어쓰고,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던 모습처럼 매복의 시간은 우리에게 겸손한 자세와 회개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소망하는 아침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기고 누리도록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코로나 일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것으로부터 돌아서고 엎드리는 시간입니다. 약속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시고 만나시기바랍니다.
기도 나를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안에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내 손을 잡고 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