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12월 12일 두 번째 대림절 주일예배 사무엘하 6장 11절-19절 언약궤와 하나님의 약속

by 노환영 posted Dec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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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12월 12일 두 번째 대림절 주일예배 줌영상 주소

사무엘하 6장 11절-19절

언약궤와 하나님의 약속

https://youtu.be/UQGt-5hVcgs

 

1212언약궤와 하나님의 약속사무엘하 611-19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주님을 사모함으로 예배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지난 수요일 오후에 영사관에 갔다가 함부르크 시청 앞을 갔습니다. 코로나가 계속 확산되고 있지만 바이나트 마켓이 열렸습니다. 코로나 이전처럼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는 않고 한산해도 성탄절 분위기는 무르익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주변에 몸이 많이 아파 검사를 했는데 코로나일구 확진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백신을 맞아 위험한 순간이 없이 회복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백신을 맞지 않으신 분들은 꼭 맞으시고 부스터 샷, 3차도 6개월 이전에 하우스아치트와 치과나 산부인과에 예약하면 됩니다. 백신 아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니 반드시 맞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에 방역을 하면서 철저하게 마스크를 하셔야 합니다.

오늘을 사무엘하 6장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안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언약궤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언약과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무엘하 611- 19을 통해 언약궤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먼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백성들을 만났던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렸던 곳은 어디였습니까? 출애굽기 2522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장소는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곳에 임재하심을 보여 주신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언약궤에 거하심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만들어서 다윗 자신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사실도 보여 주려고 한 일입니다. 다윗은 제사장들과 우림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나라를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 귀한 언약궤를 제사장 엘리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싸움에 가져갔다가 빼앗겼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역사로 다시 돌아왔지만 실로가 아닌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을 도왔던 하나님의 제사장을 85명이나 죽였습니다.

새로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궤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있지 않아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뜨거운 열심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견고하게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는 다윗의 행동은 오직 하나님만 진정한 왕이시오.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 정치와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라는 신상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신앙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의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하시는 임재를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핵심이고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배하는 요소입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부터 언약궤는 실로의 성소에 안치하였습니다. 그 장소가 이스라엘의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동안 알려지지 않는 동네에 방치되었고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실로로 다시 가져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안치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인 입지를 견고히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백성들의 삶을 통치하시는 중심이 계시와 구원 그리고 섭리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소는 하나님과 나라와 동시에 관련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직접 만들어지는 장소에 새롭게 안치한 것입니다. 언약궤를 옮기는 일은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보여 주는 선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육의 눈으로 확인이 어렵습니다. 또한 어떤 상징물로도 대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징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더 쉽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다윗이 성소를 짓고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것은 아주 적절한 조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길로 이끌기 위해서도 꼭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왕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중심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 중심, 보이는 곳에 하나님을 모시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전달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무엇을 하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내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운반하려면 언약궤는 숨겨져야 합니다. 고핫 자손들이 언약궤 사방 모서리에 달린 고리에 장대를 궤고 어깨로 메어 운반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 400년 동안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운반하는 율법에 대한 지식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을 따라 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운반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66-7절에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그런데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 사람이 죽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사람의 방법대로 하여서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동기나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방법도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는데 3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실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왕을 모시는 언약궤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선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운반하던 사람이 죽는 사고를 당하자 마음이 상했습니다. 사무엘하 69-10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그래서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일을 즐겨하지 않고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게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정신의 통일의 상징이고 지성물인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땅에 갖다 놓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다고 보는 것이 바른 이해입니다.

언약궤를 옮기려면 먼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부터 확인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사람들이 눈에 보기 좋고 편한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베레스 웃사의 신앙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소가 끄는 수레는 무엇이든 옮기기에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는 일과 비교하면 비인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성별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계로 대치한 것입니다. 그 일은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인격화시켜서 사람의 편리대로 행하였습니다.

웃사는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자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궤를 잡았습니다. 문제는 웃사의 돌발적인 행동이 평소에 웃사가 언약꿰를 다루었던 그의 습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대해는 잘못된 태도였던 것입니다. 블레셋에법궤를 빼앗겼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만지고 들여다 보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대하려는 그런 태도에 대한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하나님은 궤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이 그 궤 속에 밀쳐 넣어지고 그 속에 물건처럼 보관되어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웃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전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그 궤 안에 있게 하고 세상의 먼지와 진흙탕으로부터 하나님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자신만의 책임감을 가졌던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분위기나 환경 속에서 죄인들의 야비함과 일반 사람들의 무지함으로부터 하나님을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을 주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자체가 복의 근원입니다. 사무엘하 611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하나님은 언약궤와 함께 석달 동안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언약궤가 곳에는 복을 주시는데 심지어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사랍과 그 온 집에 복이 임했습니다. 11절에 오벧에돔은 블레셋 성읍인 가드 출신이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인 베레스 웃사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오벧에돔이 선한 일을 했거나 경건하게 언약궤를 잘 모셨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언약궤를 그냥 그 집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415- 16절에 다루는 사람들과 방법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16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맡을 것은 등유와 태우는 향과 항상 드리는 소제물과 관유이며 또 장막 전체와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성소와 그 모든 기구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거룩하지 않게 내 소견대로 만지거나 다루거나 대하면 징벌을 받습니다. 그것을 실제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화를 당한 자와 복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였습니다. 다윗은 얼마 전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으로 옮겨 오는 일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속과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속은 끊는다고 하면서 혹 세속적인 문화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누구를 예배하고 있습니까? 마땅히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은 나는 어떻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다가 베레스 웃사가 죽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연주하는 자들과 3만 명의 백성들과 궤를 수레에 싣고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더 중요하게 하나님이 원하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젊은 청년의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레스 웃사의 징계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채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녀들을 향한 뜻은 징계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레미야 29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사무엘하 612절과 15절에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동안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소유에 복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두 번째로 언약궤를 옮길 소망을 갖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번에는 언약궤를 수레에 싣지 않았습니다. 민수기의 말씀대로 레위지파의 고핫 자손의 어깨에 메고 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면서 다윗은 정말로 기뻐하며 춤을 추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미갈은 왕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업신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간혹 마음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영성 곧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는 미갈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기쁨과 열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길을 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617- 19절을 보겠습니다.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러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오며 다윗은 언약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힘껏 춤을 추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즐겁게 환호하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준비한 장막에 언약궤를 안치한 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을 축복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이 때를 위해 시편 24편을 통해 다윗이 시온에 오고 계시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가장 거룩하시며 전쟁에 능하신 영광의 왕으로 크게 기뻐하며 노래했습니다. 그 위대하신 왕께서 이제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게 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그 모습들은 미친 사람의 행동처럼 보여 멸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종류는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무엘하 61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같은 시간과 장소와 같은 행사지만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의 딸이고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다윗 왕과 온 백성들이 기뻐하고 감격하고 환호하는 시간에 창으로 구경했습니다. 구경꾼, 말씀에 대한 방관자, 비판자였습니다. 또한 백성들과 함께 뛰며 춤추는 자기 남편을 보고 마음속으로 멸시했습니다. 미갈은 자기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자기 우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행위보다는 그것을 비웃는 미갈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갈은 자기 아버지로 하여금 왕위를 잃게 했던 것과 동일한 비판적이며 저주하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더 나아가 미갈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울 가문이 이스라엘에서 지도자의 자리가 끊겼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오게 하기 위해 수고하고 헌신했던 네사람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족보에는 여자의 이름을 넣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에는 4명의 여자의 이름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하는 일에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태에게 의도적으로 여자들의 이름을 넣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비난하고 비판하고 반대자가 되어 하나님의 구속사를 방해 하는 일을 하는 구경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영혼과 한 가정과 교회 공신체와 지역사회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전하는 일에 동역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하라고 부르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배하는 사람입니까?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입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가 되시기바랍니다.

 

기도 언제나 택한 자녀들과 함께 하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와 현실로부터 지켜 주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은혜를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간에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을 만나 주시고 소원들을 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오심과 만남을 통해 구속의 은혜와 온전한 구원이 회복되어서 행복한 연말이 되게 하시고 간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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