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5일 “작은 일도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하자.” 여호수아 7장 1절-7절

by 노환영 posted Jul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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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작은 일도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하자.” 여호수아 71-7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 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2020년 상반기 6개월은 코로나 19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 주시고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해야 합니다. 2020년 하반기 7월 첫 주일예배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함부르크는 확진자가 늘지 않아 다행입니다. 피서철을 맞아 Ostsee에서는 신호등 시스템을 도입하여 온라인으로 알리고 통제한다고 합니다. 일상의 방역에 힘쓰고 살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여호수아 7장에서는 바쳐져야 할 물건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과 그 물건이 바쳐진 후에 생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쳐졌다는 개념이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 바치다살리다의 반대였습니다. 여리고성의 모든 것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고, 오직 라합과 그의 가족만 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살리라는 말은 바치라는 반대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치라는 말은 또한 죽이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가치와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없게 할 옛것들을 모두 죽이고 새롭게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죽이기 위해서는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져야 합니다. 이런 개념이 여호수아 7장을 읽고,묵상하고,공부하고 적용하며 이해를 하는 중요한 포인트 역할을 합니다.

 

먼저, 기생 라합과 아간의 다른 점입니다.

여호수아 6장과 7장에 나오는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6장의 주인공은 기생 라합이고, 7장의 주인공은 아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옆에 배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에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4장에는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면서 슬픈 인생을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상황과 두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아주 대조적입니다. 아주 조용한 밤에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예수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는 유대 관원으로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밝은 대낮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영생을 선물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어떤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옆 장에 사람과 사건을 배열하는 구조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 6장과 7장의 배열도 그런 구조입니다. 6장에는 라합이라는 참 기구한 운명을 가진 기생출신의 여인이 나옵니다. 당시 가나안은 죄악이 극에 달하여 먹고 마시고 우상을 섬기는 성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팔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25절에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은 하나님과 그의 군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협조를 했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끝이 아름답게 바뀌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명성을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은 다릅니다. 여호수아 725-26절에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오늘까지 있더라는 말은 라합의 경우도 오늘까지 ....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생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라합은 구원의 소망과 아름답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순간의 작은 일로 저주와 멸망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아간 같은 인생의 끝을 맺어야 할지, 라합 같은 인생의 끝을 맺어야 할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라합은 이방의 우상문화 속에서 멸망과 저주와 설움과 비통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접하고 돕습니다. 그 결과 멸망하던 성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받고 영광스럽고 복된 인생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7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그의 족보와 함께 소개했습니다. 유다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최고의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그 이유는 이 유다지파를 통해 메시아가 오심을 성경에서 계속 강조하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뜻은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메시지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그렇게 영광스럽고 복된 지파였습니다. 거기에 세라의 증손이었습니다. 세라라는 이름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씨를 뿌리다라는 뜻입니다. 뭔가 푸르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먼 훗날 결실과 열매를 바라보면서 씨를 뿌리는 기원에 해당하는 가문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여명, 빛이 떠오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조상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리고 삽디의 손자입니다. 삽디라는 이름도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선물이 아니라 기쁨의 선물입니다. 이름들이 참 좋습니다. 아간은 누구의 아들이었습니까? 갈미의 아들인데 갈미라는 말은 열매입니다. 그냥 열매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포도 열매를 뜻합니다. 포도 열매의 뜻은 주렁 주렁 맺히다는 것이었 습니다. 씨를 뿌리고, 기쁨의 선물이 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이제 남은 일은 거두고 누리는 것입니다. 영광만 남아 있습니다. 그 역할이 아간의 때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의 이름의 뜻이 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였습니다.

아간과 라합의 배경은 전혀 비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아간은 금 수저로 엄청나게 좋은 가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끝은 사고뭉치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라합은 흑 수저로 죄인 중에 멸망할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라합의 끝은 긍휼함을 입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성경기자가 왜 이 두 사람을 비교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나요?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어떤지를 이 두 사람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방인으로 라합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죄값으로 진노아래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복입니다. 아간입니까? 라합입니까? 이제 선택을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택을 하시기바랍니다.

 

다음은 아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7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아간을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왜 중요할까요? 아간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도둑질하고 들켜서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 돌무더기에서 죽었다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나쁜 분으로 매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둑질 한 것 가지고 엄하게 그런 벌을 내리실까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기 아간의 범죄는 도덕적인 차원의 탐심에 관한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영적인 원리를 깨뜨린 영적인 차원으로 봐야 합니다. 앞에서 여호수아 6장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바친다는 말은 죽인다는 의미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이 나옵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구별된 자라는 말에서 헌신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우리는 헌신에 대해 잘못 오해를 합니다. 보통 헌신한다고 할 때 행위로 무엇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헌신이 무엇일까요? 밖에 나가서 전도하는 일, 교회 식당에서 봉사하는 일, 예배시간에 안내하는 일등 모두 봉사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헌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헌신이란 구별되어 지는 것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별된 존재, 죄와 사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이라는 말 속에 아주 중요한 개념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뭔가 하는 것이라고 보면 헌신하는 일이 이 쉽습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교회에서 우리들이 하는 일들도 헌신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헌신은 내가 어떤 존재로 구별되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헌신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 모든 삶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직장의 상사와 부하직원으로서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로 구별되어야 하는가에 관점을 두면 삶의 모든 영역은 내가 부딪쳐야 할 싸움이 됩니다. 그 모든 영역에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건강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보이는 행동들보다 내 존재를 보여주는 일을 힘써야 하는 아주 어려운 싸움입니다.

민수기 63- 6절에 구별된 사람으로 나실인이 하지 않아야 할 3가지기 있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셋째, 부정한 것,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시체는 죽음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죄 값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 다시 말하면 시체를 볼 때마다 죄 값이 어떠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우상과 죄악으로 얼룩져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서 살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 원리를 깬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죽은 것에 손을 댄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수의 피로 대속을 받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일단 신분상으로는 심판과 죄 값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바쳐진 것, 죽은 것에는 손을 대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를 깨뜨리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간이 저지른 범죄는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구원의 원리를 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두 번 죽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과거와 옛날로 돌아서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우리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을 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끼리는 한국말을 하면 말이 통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 철학이나 이념을 이야기 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과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언어가 같다고 통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하기 전에 아간은 이것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디에 삶의 기초를 놓느냐는 문제에서 아간이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겉으로는 화려하고 성공한 인생처럼 보여도 그 인생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반석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찬송가 204장 가사 중에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마태복음 7의 내용을 근거로 작사한 찬송가 가사입니다. 인생의 집을 잘 짓는 것이 어떤 재료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었는가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기초를 어디에 두었는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간의 범죄는 이처럼 전 영역에서 무서운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 한 사람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여호수아 72-3절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초를 놓지 않는 인생이 무엇을 의존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범죄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다수의 가치를 의존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 사관입니다. 막시즘,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고의 근거는 기독교와 가장 강력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유물론적 사관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돈으로 다 된다. 물질이 모든 것의 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해 주신 여리고의 승리에 도취되어 아이성을 바라 보았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고 약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전 군대가 다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힘의 논리,숫자의 논리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100명쯤 모이니 좀 더 모여 3백 명만 되면 무슨 일이든지 겁날 것 없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고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공신체와 영적인 공신체는 상대가 많든 적든, 우리의 숫자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원리만 통할 뿐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싸움인가입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내가 이 정도의 은행 잔고를 갖고 있고, 이 정도의 퇴직금을 준비해 놓았으니 앞으로 사는 것은 걱정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땅이 기초를 놓으시고 우주를 펴신 분이십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곳에 눈보라를 치면 집들이 마치 성냥갑처럼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으로 세상을 덮으면 아파트 꼭대기도 보이지 않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이 눈 속에 길을 굴처럼 뚫고 다닙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물질, 과학만능주의라는 우상에 묶여서 대단한 것처럼 교만을 떨고 착각을 합니다. 그것은 물질사관에 묶인 것이고, 힘의 논리에 인생의 기초를 놓은 모습입니다.

요즘에 전 세계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코로나 19는 하나님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교만한 인간들에게 보이시고 교훈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빠져 있는 인생의 모든 출발과 생각이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생각이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저들은 작으니 우리는 소수만 가도 되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모둔 전쟁의 원리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이 무너졌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 전쟁은 수의 논리로 접근했습니다. 그 결과는 패배였고 사람들이 죽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항상 생각하십시오. 물론 도덕과 윤리적으로도 깨끗하고 흠이 없게 삶을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불렀던 찬송가 585장 가사에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앞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고 더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나의 상대가 얼마를 가졌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싸우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이 전쟁터와 같습니다. 매일의 삶속에 내가 정말 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두는 싸움입니다. 코로나도 앞으로 더 큰 질병이 온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어떤 싸움도 날마다 이기고 누리며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어머니 복중에 짓기 전부터 아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남은 생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기초를 두고 주님을 닮아가고 따르는 삶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지난 반년 동안 지켜 주시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반기 6개월도 주님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코로나 19를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믿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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