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해 계획하신 복.” 여호수아 6장 15절- 21절

by 노환영 posted Jul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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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해 계획하신 복.” 여호수아 615- 21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6월 마지막 주일예배에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을 주님이 축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로 평안하셨습니까? 코로나 19에 걸리지 않도록 생활방역과 지침을 따라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호수아 615-21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해 계획하신 복에 대한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먼저 나팔을 부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615-16절에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장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주 높은 구룽지에 위치한 견고한 요새인 여리고성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서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사령관으로 백성들을 지휘하십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앞 뒤에 이스라엘 백성을 서게 하시고, 가운데 법궤를 맨 제사장들을 세우셨 습니다. 7명의 나팔수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법궈 앞에서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팔을 부는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모두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행렬은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잊지 않아야 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이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나팔을 부는 두 가지 개념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전쟁을 하기위해 선전포고를 하는 행동입니다. “하초츠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뜻은 나팔을 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소파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완전한 평화와 평안을 선언하는 차원에서 나팔을 불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본문의 여리고 성을 돌면서 7명의 나팔수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여기서는 하초츠라가 아닌 소파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리고성은 총과 칼을 가지고, 사람의 능력으로 싸워 얻을 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 약속을 굳게 믿기 때문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소파르 즉 이 땅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나팔을 불면서 돌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616절에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617절에서 그 성이 무너진 후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그 성을 정복한 후에 그 성에서 얻게 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여러분 앞을 가로 막는 여리고 성 같은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나라에서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평안과 평화가 있습니까? 어떤 싸움이 있든 이미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와 평안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순종하십시오. 약속하신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여러분에게 역사해 주십니다.

 

다음은 죽이라는 명령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617절에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살려 주라는 말이 나오고 그 반대의 개념으로 바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전에서 살리다의 반대말은 죽이다

입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바치다는 말과 죽이다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들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은 모두 죽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여호수아는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여호수아가 즉흥적으로 내렸던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었던 말씀입니다.

신경기 2016- 17절에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무자비한 진멸을 명령하셨을까요? 신명기 2018에서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범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인본주의적 사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세상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뭐라고 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진군을 앞두고 젖먹는 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할 정도로 무자비한 명령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에 들어 있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한 영혼도 버림받지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창세기 12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은 갈대아 우르로 아브라함이 태어난 출생지입니다. 이 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입니다. 우르라는 말은 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상을 섬기는 본산지라는 뜻입니다. 그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의 육적인 고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일방적으로 그를 불러 내셨습니다. 또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122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복을 주셔서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복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갈대아 우르와 같은 육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 고향이 눈에 보이는 어느 장소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보이지 않게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기억이나 고집, 어떤 습관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서 온전히 떠나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보내시는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의근원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을 받아서 창고에 가득 채우고 나 혼자 잘 먹고 마시고 누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여러분! 근원이라는 말은 뿌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파이프라인이라고 말합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탱크에서 물이 흘러 나와서 파이프를 타고 옵니다. 파이프가 없으면 물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파이프를 만들어서 세상 모든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기 위해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고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고 그늘 높이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과 지위를 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도록 주시고 시간과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를 예수의 피로 구속하시고 세상에서 불려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축복을 흘러 보낸 통로로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고, 지위를 높여 주시고, 물질의 복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2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결단과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때 이미 하나님은 가나안 땅 백성들을 위한 축복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 중동지역과 무슬렘 등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우상이 가득한 땅을 위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복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인생 안에 설계하셨던 계획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시고 각자가 있어야 할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함부르크에 계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실 축복의 통로로 만드시고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창세기 151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사대 만에 이 땅에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땅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위해 쓴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못된 면을 강조할 때는 에브라임 사람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에브라임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못된 면을 상징할 때는 에브라임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의 악함을 상징할 때는 아모리족속이라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아모리 족속은 또 다른 어떤 족속이 아닙니다. 가나안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그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대 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가 되면 아모리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죄악이 가득 찼을 때 그들을 그 땅으로 들여 보내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가나안에 갖고 계획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아모리족속, 즉 가나안 땅의 백성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으로 보내는 것도 하나님이 그 땅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 때 기생 라합이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210-11절에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소문을 기생 라합만 들었을까요?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다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나안 사람들이 여리고성에서 문을 닫아 걸고 하나님의 군대를 향하여 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기생 라합만 창문을 열고 붉을 줄을 내리고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날까요?

성경로마서 1122절이 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이 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라합만 창문을 열고 그 구원의 날을 소망하였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커다란 영적 상징을 발견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도 전도의 미련한 것이 택함 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증거요, 택함받지 못한 자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된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말을 전해주지만 한 사람은 탕탕 튕기고, 한 사람은 왜 이제야 그 소식을 나에게 전해 주느냐고 반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종할 때 기생라합처럼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잠언 2814절에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 안에, 교회에, 주님의 몸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는 것 자체는 땅을 저주하고 진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 땅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복된 일도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그 이유로 그들을 모두 다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바친다는 말든 죽인다는 뜻입니다. 이 죽인다는 의미는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는 이런 영적 의미들이 농축되어 있어서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여러 부분을 함께 찾아 봐야 합니다.

레위기 2728을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바친 것, 즉 죽인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성도라는 단어는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입니다. 우리가 언제 거룩하게 되었나요? 우리의 힘과 돈과 실력으로 득도를 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근거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법궤를 중심으로 그 앞에 평안을 선포하는 나팔수, 즉 제사장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 법궤 위의 속죄소에 쏟아 부어지는 어린양의 피로 인해 이 도성은 이미 함락되고 구원을 얻었다는 선포를 하게 했습니다. 이 전쟁은 총칼로 싸워 얻는 싸움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나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나도 그 속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격이 안 되고, 신분도 안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날마다 영광스러운 은혜의 보좌 앞,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라는 신분과 복을 누리는 근거입니다. 그 전제조건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가나안 땅은 먼저 죽음이 임하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 없는 땅입니다. 그러면 누가 죽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기 위해,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던 언약궤를 메고 그 성을 돌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전제되지 않는 거룩함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에서부터 우리의 거룩은 시작됩니다. 거룩한 땅,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내셔서 아브라함의 비전을 갖고 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비전이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삶의 현장과 주 변을 살펴 보면 죽음의 땅, 생명 없는 영혼들이 안 밖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 이 자리에 나를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 생명의 복음이 증거 되고 전파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그 꿈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도 일어나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여리고처럼 황폐한 땅, 영혼의 불모지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회복되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축복이 흘러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눈을 감을 때까지 복을 전달하는 파이프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우리를 통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을 듣는 자리에 함께 하는 복을 주심도 고맙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받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도와 주옵소서.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지키고 약속하는 은혜를 누리고 전달하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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