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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사람이 할 수 없는 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합니다.”

여호수아 61-1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6월 셋째 주일예배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코로나 19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걱정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또한 예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함부르크는 다른 도시에 비해 확진자 수가 한 단위로 내렸고 안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 19를 잠잠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일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서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신다 입니다.

어떨 결에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염려와 불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 강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하나님의 인도로 건넜습니다. 요단 강 가운데 피 흘린 어린양의 상징을 담은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서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단강을 가르시고 마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그 후 이제는 되었나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더 철저한 준비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 점령을 위한 싸움 앞에 여호수아 앞에 한 사람이 칼을 들고 길을 막아섭니다. 여호수아는 당신은 우리를 위합니까? 대적을 위하느냐? 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든 문제점이 담겨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제거해야 할 문제점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삶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붙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부르는 존재로 여기며 산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은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의 현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대답을 합니다. 아니다. 너를 위해 온 것도, 너희 대적을 위해서 온 것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이제 왔다. 여러분! 여호와의 군대는 누구입니까? 출애굽기 12장에서 그 군대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혁명적인 생각의 전환의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칼을 빼어 들고 우리에게도 생사를 거는 결단을 요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야! 지금까지는 광야에서 너의 인생의 주도권을 네가 붙잡고 살았지만 네가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곳이란다. 그래서 내가 이 공동체, 하나님의 군대의 사령관으로 지금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말을 듣고 즉시 땅에 엎드려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종으로 자세를 낮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부터 5장의 말씀을 다시 살펴 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부르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권리와 책임을 내려놓고 그 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 아래로 내가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진짜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남은 생애 그런 삶을 결단하고 살아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전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 앞에 이르렀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여리고 성의 높이가 8미터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께도 6.8미터나 된다고 했습니다. 여리고성은 포를 쏴도 무너지지 않는 두께입니다. 또한 여리고성은 높은 구릉지역에 있었습니다. 이 성은 사람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수아 6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계 전쟁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전쟁에 명장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명성을 얻게 된 전략의 근거를 찾아보았더니 뜻밖에도 여호수아 6장부터 11장에 있는 전쟁의 원리를 실전에 적용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근대 전쟁역사에서는 에드먼드 알렌비라는 영국의 유명한 사령관이 자기 이름을 붙인 알렌비 전략으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했습니다. 그 전략의 근거 역시 여호수아 6장부터 11장이었습니다. 이처럼 세계 전쟁역사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여리고성은 무너뜨리기 어려운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을 해야만 했던 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도 여리고성처럼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저히 내 상식이나 내 판단과 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그런 힘들고 어려운 문제 앞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칼을 빼 들고 우리의 대장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전략을 주십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어떤 놀이로 생각나게 만듭니다.

여호수아 6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아직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기록자가 완료형으로 썼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다보면 완료형 표현들이 많습니다. 적들을 먼저 넘겨주셨다고 했습니다. 된다는 말일까요? 안 된다는 말일까요? 이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함께 찾아 볼까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63-5절에 전략을 말씀하셨습니다.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제사장 일곱 명을 뽑아 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군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을 앞에 세워 양각나팔을 불라고 했습니다. 그 나팔부대 뒤에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배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의 군대라 부르는 백성들을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준비가 전쟁을 하려는 배치일까요? 아이들이 봐도 이것은 전쟁을 하려는 배치가 아니었습니다. 제일 앞에 일곱 제사장으로 만든 나팔수가 서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구약성경의 나팔을 불 때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는 하초츠라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나팔을 분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전쟁을 하자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파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쓰는 경우는 전쟁을 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이미 이 땅에 평화가 왔다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은 어떤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여호수아 6장에서는 하초츠라가 아니라 소파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리고성이라는 요새 앞에서 전쟁의 개념과 상관이 없는 소파르를 썼습니다. 이는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평화를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안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은 전쟁을 하기 전에 평화를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아주 중요하고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팔부대 뒤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위한 작전도 아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제사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성경 민수기 107-8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 8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이 나팔을 군인들이 불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자손이 불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민수기 109-10절에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10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이 불게 하신 나팔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희년을 선포합니다.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말하며 그로 말미암은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정치적, 경제적, 힘의 균형에 의한 평안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모든 죄가 끊어지고, 악의 세력이 물러가고 어둠과 저주가 떠나간 상태에서 인하게 되는 온전한 평안을 뜻합니다.

이 평안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실 때 천사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그 찬양 내용이 누가복음 2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풍부하고 정신적으로 든든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탄생하실 때 임하였던 평안의 정체는 근본적으로 평안입니다. 우리 영혼이 모든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되는 평안이었습니다. 흑암의 권세에 눌려 고통당하던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평안입니다. 바로 그러한 온전한 평안을 의미합니다. 많은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를 파헤쳐 보면 결국 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평화롭게 보이더라도 어린양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서 부터 기이한 평화가 아니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대속 사건을 어느 날 천둥이 지는 것처럼 맞닥뜨린 사람, 그 생명을 경험하게 된 그 사람에게는 삶의 모든 원리가 달라집니다.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는 시간이 옵니다. 나뭇잎 하나, 잎사귀에 이는 바람도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내 가슴 깊은 곳에 마치 여리고 요새와 같은 모든 죄악의 도성이 무너지는 바로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온전한 평안, 완전한 자유가 임합니다. 이 자유와 평안을 경험한 사람은 담대해지고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이러한 선언을 하는 것이 바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이 도성에 드디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홀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뒤를 믿음으로 쫓으면 됩니다. 그래서 그 언약궤 뒤에 백성들이 따라가는데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침묵을 명령하셨습니다.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만 알게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만과 불평의 모든 원인은 불씬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침묵하라는 어찌 보면 매우 엉뚱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내내 불평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여리고성을 돌면서도 불평하였다면 행렬은 아마 순식간에 와해도 버렸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537절에는 예수님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딱 한 마디를 내 뱉으시며 절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46절에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하시니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말하고 운명하셨습니다. 그 순간 수천 년 가로 막혔던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던 취장이 아래에서 위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찢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시고 아들을 죽이셔서 우리를 속량 제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순종하여 끝까지 침묵으로 성을 돌았던 자들만이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성경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처음 기적을 베푸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시작을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입니다. 가나에 결혼잔치가 있었고 예수님과 어머니와 제자들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결신식은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있어 일생에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유대인들도 기쁨의 상징으로 신랑과 신부가 빠지더라도 포도주는 빠져서는 안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날 잔치 중에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잔치가 중단될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원래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잔치를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연락을 하고 교제하고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와서 그 잔치는 중단되고 하나님과의 잔치 인생이 중단되었습니다. 절망이 다가오고 눈물이 흐르고 고난이 임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고통의 바다가 된 이유는 잔치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 누가 초대되어 함께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 이 사건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잔치가 중단되려는 순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이 정색을 하면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요한복음 24절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자여 라는 말은 구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어머니를 비하하거나 낮춘 말이 아닙니다. 황후에게나 붙이는 극 존칭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처럼 말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비범함을 알고 그 정도 기적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거절했습니다. 거절 속에는 어머니, 아무리 존경하는 어머니의 부탁이라고 해도 나는 이 땅에 온 이유가 이런 육적인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끓어질 잔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물로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는 것은 어머니의 요구에 응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지를 보여주고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포도주가 잔치자리에 나오자 사람들이 놀라고 반응했습니다. 보통 잔치 집에서는 처음에 좋은 포도주가 나오고 취할 정도가 되면 맛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놓는데 이 집은 나중에 나온 포도주가 더 맛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기독교는 갈수록 좋아집니다. 중단될 잔치가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장차 예수님이 흘려야 할 십자가의 피를 상징합니다. 단순히 이 땅에 기적을 행하려고 온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우리들이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기적의 비밀을 누구만 알았느냐 입니다. 물을 항아리에서 붓고 떠온 하인들만 알았습니다. 하인들이 포도주를 떠서 상에 내었나요?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물을 떠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인들이 대꾸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물을 떠서 갖다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이고 우리가 따를 삶의 원리입니다.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잔치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회복되는 잔치임을 보여 준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라고 하시나 전쟁을 앞둔 병사들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묵하고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때 마침내 요새가 허물어져 내리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전쟁 전에 양각 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그리고 소파르 즉 진정한 평안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대속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어떤 삶의 문제 앞에서도 담대하고 평화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양각 나팔을 마음껏 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파르를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어떤 문제가 다가와도 담대하게 평화를 선언해야 합니다. 코로나 19가 두려움을 가져오고 힘들게 하지만 모두 평안하시고 평화를 전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기쁨의 잔치를 회복하고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람의 힘과 능력과 방법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직접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주님께 내려 놓게 도와 주소서.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안에 넘치게 하옵소서. 코로나 19를 주님께 맡깁니다. 역사하시 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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